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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고 집요하게 들춘 이란사회의 병폐…영화 "성스러운 거미"

연합뉴스 입력 02.01.2023 09:16 AM 조회 1,344
사이드 하네이 사건에 바탕…이란 정부의 방해·탄압 이겨내고 완성
영화 '성스러운 거미' [판씨네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이란의 마슈하드.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인 이맘 레자 영묘 주위를 뱅뱅 돌다 한 여성 앞에 선다.

남자는 슬쩍 돈뭉치를 보여준 뒤 진한 화장을 하고 히잡을 둘러쓴 여성을 오토바이에 태운다. 남자와 함께 떠난 여성은 이튿날 차도르에 칭칭 감긴 채 차가운 주검이 되어 발견된다.

영화 '성스러운 거미'는 2000년대 초 이란 최대의 종교도시 마슈하드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범인 사이드 하네이는 피해자들의 시신을 차도르로 감싸 길거리에 내다 버렸는데 그 모습이 거미가 먹잇감을 거미줄로 둘둘 말아 매달아 놓은 듯해 '거미 살인마'로 불렸다.

약 1년 동안 16명의 성판매 여성을 살해한 그는 재판 당시 "더러운 여성들을 죽여서 도시를 청소하는 종교적 의무를 행했을 뿐"이라 주장하면서 이란의 일부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영웅'이라 칭송받기도 했다.



영화 '성스러운 거미' [판씨네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는 초반부에 사이드(메흐디 바제스타니 분)의 범죄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면서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일찌감치 알린다. 대담한 연출 방식과 가상의 인물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를 통해 이란 사회의 병폐를 파헤치는 데 집중한다.

감독은 한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쇄살인마 영화가 아닌 연쇄살인마가 태어나는 사회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정치·종교적 부분이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 집중하면서 이란 내 뿌리 깊은 여성 혐오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 라히미는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인 여성이자 정치·종교 권력의 감시자인 저널리스트다. 미혼 여성인 그는 호텔에서도 혼자 왔다는 이유로 예약이 취소될 위기에 놓이고, 우여곡절 끝에 체크인한 뒤에도 직원에게 '머리카락을 똑바로 가려야 한다'는 훈수를 듣는다.

취재 과정에서도 남자 기자보다 정보에 뒤처지고, 경찰에게 성적 희롱·폭언을 들으며 이란 사회의 여성 혐오를 온몸으로 감내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위장 취재까지 해가며 연쇄살인마를 집요하게 쫓는다.

'성스러운 거미'는 사이드라는 인물을 그리는 데도 범죄자의 '악마성'이 아닌 '평범함'에 집중한다.







극 중 사이드는 아내와 두 아이에게 충실한 가장이자 평범한 건설 노동자다. 집에서 배우자의 눈치를 살피고 딸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준다. 그런 그가 성 판매 여성을 '부정하다'고 낙인찍고 죽이는 데에는 한 치의 망설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구분하는, 뒤틀린 가부장제 사회 속 남성의 모습이다.

참전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그는 '시시한 건설업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에 열패감을 느끼고, 이런 비뚤어진 남성성과 인정욕구는 약자를 향한 분노로 표출된다.

여기에 사이드의 범죄를 옹호하는 아내, 아들, 이웃들의 모습은 이란 내에서 뿌리깊은 가부장제라는 체계가 종교적 교리와 결합해 더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비춘다.



영화 '성스러운 거미' [판씨네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힘은 진정성에서 나온다. 알리 아바시 감독은 이란에 이어 터키에서까지 방해를 받은 끝에 요르단에 가서야 촬영을 완성했다.

이번 작품으로 지난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라히미 역의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과거 연인과의 애정 행각이 담긴 영상이 유출되면서 이란에서 박해받았던 배우다. 자국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그는 2006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살인마 사이드 역을 맡은 메흐디 바제스타니는 이란을 대표하는 배우였으나 '성스러운 거미'가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뒤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제작진의 보호를 받으며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지난해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금됐던 한 여성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아바시 감독과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지난해 10월 런던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이란 정부를 비판하며 '히잡 시위'에 목소리를 보태기도 했다.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라히미'는 영화를 위해 탄생한 허구의 캐릭터이지만 지금 이란에는 자유를 위해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수천 명의 진짜 '라히미'들이 있다"고 전했다. 8일 개봉. 118분.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성스러운 거미' [판씨네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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