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이야기

진 최

진 발레스쿨 원장

  • 한국 무용교사협회 미지부 회장 미주예총이사
  • 한미무용연합회장

449. 처음 만난 ABT 발레단 “실비아” 공연 리뷰

글쓴이: 발레리나  |  등록일: 04.13.2026 10:27:10  |  조회수: 74


처음 만난 ABT 발레단 실비아공연 리뷰

Sylvia – American Ballet Theatre, Segerstrom Center.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실비아(Sylvia)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섰다. 평생 발레를 해왔다고 말하면서도 이 작품을 실제 무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그것은 곧, 생애 처음 만나는 실비아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시거스트롬 공연장은 왕복 세 시간의 거리였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길을 자스민과 함께 나섰다. 해마다 이곳에서ABT 발레단의 공연을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마음이 설레고 들뜬 적은 없었다.


 공연을 앞두고 책장을 뒤적이며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실비아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실제로는 처음 만나는 작품이기에, 흐릿한 지식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토슈즈 위에 피어난 작은 예술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그 순간, 발레와 미술은 따로가 아닌 하나의 감각으로 이어져 있음을 다시 느낀다.


 ABT 발레단은1939년에 창단하여 고전 발레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미국을 대표하는 발레단이다. 한국 무용수 서희와 안주원이 그 흐름 속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무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본 토요일 저녁 공연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발레실비아(Sylvia) 1876년에 초연된작품으로, 그리스·로마신화를 바탕으로 하며음악은 레오 들리브, 안무는 루이메랑트가 맡은 후기 낭만주의발레이다. 이번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공연은 프레데릭애쉬턴 버전을 바탕으로10 만에 재구성되어 LA에서 처음선보인 무대다. 그래서 신선하게 다가온 것일까? 객석에빈자리를 찾아볼 없을 만큼 관객들로 가득찼다.


오르페우스, 아폴로처럼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다루는 발레들과 같은맥락에 있지만, 작품은조금 다른 결을 지닌다. 사냥의여신 아르테미스를 따르는님프 실비아는 사랑을거부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백색발레의 청초함과는 거리가 자유롭고 용감한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사랑을 거부하던 존재역시 결국 감정 앞에서는무너진다. 큐피트의 화살은의지보다 먼저 마음에 스며들고, 납치와위기를 지나 실비아는 마침내아민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발레에서는 드물게 따뜻한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다.


막이오르자 무대는 단번에다른 세계로 바뀌었다. 특히 1막에서가장 강렬하게 남은장면은 큐피트였다. 그는 거의 30동안 조각처럼 있었고, 무용수인지 조형물인지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어느 순간, 정지된 시간이깨지듯 살아 움직이며 코믹하면서도절제된 동작으로 사랑을전달한다. 순간, 무대는 비로소숨을 쉬기 시작했다.


역시 클래식 발레의 힘은 무대에서 드러난다. 웅장한 배경과 화려한 의상, 마치 마술처럼 인물이 사라지고 다시 등장하며 집과 배경이 살아 움직이듯 바뀌는 장면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현대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압도감이었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 발레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레오 들리브(Léo Delibes)의 선율, 늘 듣던 그 음악이 이 무대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 있었다. 익숙한 것이 예술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공연을 보는 동안, 아르테미스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차가운 여신이라 여겼던 존재가 마지막에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축복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한 존재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한편, 무대 속 고양이 캐릭터의 등장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호두까기 인형처럼, 고양이는 본능과 유희를 담은 디베르티스망으로 극에 생기를 더하는 존재다. 이번 실비아에서도 그 움직임은 유쾌한 여운으로 남았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반. 그러나 이상하게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결국 거울 앞에 섰다. 공연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큐피트의 자세를 따라 해보았다. 나 역시 한 번쯤 그처럼 서 있어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나 채5분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무대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던 그 시간이 얼마나 깊은 집중과 힘 위에 서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발레 속에서 다시 나를 만나며 그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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