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및 심리상담

김소영

LCSW 상담사

  • Licensed Clinical Social Worker
  • LCSW #136971

2편-부모의 보호자가 된 아이

글쓴이: 김소영상담사  |  등록일: 09.18.2026 22:27:14  |  조회수: 50

지난 칼럼에서 부모의 보호자가 된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일찍 어른의 역할을 맡았던 아이는 성인이 된 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철이 일찍 든 어른 아이’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글은 낯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이민 가정 부모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상황을 그 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눈으로도 한번 바라보고, 상담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들 중 우리가 기억해두면 좋을 부분을 함께 나누기 위한 글이다.


부모화는 어린 시절에 끝나는 역할이 아니다. 

어릴 때 익숙해진 책임감은 성인이 된 뒤에도 관계와 일상 속에서 반복되곤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도왔던 아이는 누군가를 돕고, 참고, 책임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일이 몰려도 거절하지 못하고, 연애에서는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핀다. 겉으로는 배려심 많고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심리학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신의 책임처럼 받아들이는 과잉책임감을 보일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런 과한 책임감은 생각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연락이나 부탁 앞에서 몸의 긴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담실에서 만난 어른 아이는 말했다.

“집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벌렁거려요. 벨소리만 들어도 긴장돼요.”


전화벨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또 어떤 부탁과 책임이 따라올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족끼리 그 정도도 못 해주나?”

가족은 서로 도울 수 있다. 부모를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통역을 하고 병원 예약을 잡아주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물론 부모에게도 아이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도움을 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부모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 나는 아이가 정말 거절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부탁했는가.
  • 아이가 “하기 싫어”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받아들였는가.
  • 내 부탁은 아이에게 선택할 수 있는 ‘도움’이었는가,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의무’처럼 느끼게 했는가.


‘의젓한 아이였던 어른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부모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저밖에 할 사람이 없었어요.”

오히려 부모의 사정을 너무 잘 이해하기 때문에, 어린 자신이 너무 오래 어른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더 서럽다.


지난 칼럼에서 말했듯이, 아이 한 사람에게 모든 역할이 몰리지 않게 하는 부모의 노력도 필요하다. 

다른 어른이나 기관, 통역 서비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먼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직접 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이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때로는 부모의 서툰 영어가 민망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해보려 했던 모습은 시간이 지나 존경과 안쓰러움이 함께 드는 기억으로 남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부모가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영어가 유창한 아이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분명히 있다.중요한 것은 그 도움을 어떻게 요청하느냐이다. 아이가 내가 선택해서 도와주는 일’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먼저 시간을 물어볼 수 있다.

“지금 괜찮아? 오늘이 어렵다면 언제 가능해?”

한 번 도와줬다고 다음에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아이가 거절했다고 해서 서운함이나 죄책감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도움을 받았다면 아이의 시간과 수고를 인정해줘야 한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네가 도와줘서 정말 도움이 됐어.”


부탁이 끝난 뒤에는 아이가 그 일을 어떻게 느꼈는지도 물어볼 수 있다.

“전화 통화는 어땠어? 어려운 건 없었어?”

이런 질문은 아이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나는 네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지만,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아. 그리고 너는 여전히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야.’


무엇보다 아이가 싫다고 한다면 그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안 해줘도 괜찮아. “오늘은 어렵구나. 괜찮아,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설명보다, 거절해도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경험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철이 일찍 든 아이’에게도 부모의 문제와 내 책임을 구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모든 부탁을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거절한다고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을 먼저 산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부모의 어려움에 공감하더라도, 그 문제까지 모두 내 책임으로 떠안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담실에서 만난 보호자가 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국 필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몫을 구분하는 일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아이의 시간과 삶을 당연하게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나 지지해줄 필요가 있다.

아이 역시 어린 시절 생긴 억울함과 부담감에 오래 머물기보다, 익숙해진 책임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연습도 필요하다.


쉽지 않은 타국 생활 속에서도 서로의 짐이 아닌 건강한 지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때로 불편함과 서툶을 감수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일이자, 결국 함께 성장해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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