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및 심리상담

김소영

LCSW 상담사

  • Licensed Clinical Social Worker
  • LCSW #136971

한국 부모, 이민 자녀 — 부모의 보호자가 된 아이

글쓴이: 김소영상담사  |  등록일: 09.03.2026 00:02:43  |  조회수: 73
한국에 살던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부는 열심히 일했고,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

어느덧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영어도 곧잘 하고 외국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부모는 뿌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부모는 영어로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이에게 하나씩 부탁하기 시작했다.

병원, 관공서, 보험회사, 카드회사에 전화하는 일. 집으로 날아온 편지를 읽고, 온라인 주문이나 서류 작성을 돕는 것도 아이의 몫이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부탁이었다.

“엄마, 이거 한번만 물어봐 줘.”

그러나 어느 순간 부탁은 아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되어있다.

부모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정도도 못 해주니?’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잃는 것이 있다.

자율성과 선택권, 그리고 아이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이다.

아이에게도 놀고 싶고, 친구를 만나고 싶고, 아무 책임 없이 쉬고 싶은 시간이 있다.

하지만 부모의 부탁을 받는 순간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보험회사에 전화하고, 병원 예약을 잡고, 서류를 해석한다. 전화는 바로 연결되지 않고 몇십 분씩 기다리기도 일쑤다. 어렵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말.

“이런 것도 못 해? 이게 뭐가 어려워!”

아이는 부모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점점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가 나면서도 부모가 측은하다.
싫으면서도 미안하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부모를 두고 떠나면 안 될 것 같다.

사랑하지만 부담스럽고, 돕고 싶지만 도망가고 싶은 양가감정이 생긴 채 해소 되지 않은 감정이 쌓여만 간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부모는 아이가 점점 냉랭해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미국에서 자라서 그런가? 학교가 힘든가?”

그러나 아이의 차가움 뒤에는 오래된 피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아이에게 의존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가 나이에 비해 부모의 역할이나 책임을 과도하게 떠맡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한다. 특히 이민 가정에서는 언어 문제 때문에 이런 역할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다.

부모에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고 실제로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아이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통역사이자 해결사 역할을 해온 사람이 성인이 되어 상담실에 오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전화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부탁을 거절하면 죄책감이 들어요.”

“집을 떠나면 부모를 버리는 것 같아요.”

때로는 오래 쌓인 책임감과 불안이 공황과 같은 신체 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물론 부모를 돕는 경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탁을 했느냐가 아니라, 아이가 그 부탁을 어떤 경험으로 받아들였느냐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아이를 아이로 대하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탁할 수 있다. 그러나 부탁은 부탁이어야 한다.

“네가 당연히 해야지”가 아니라,

“엄마가 영어가 어려운데 혹시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도와주었다면 말해줘야 한다.

“덕분에 해결했어. 고마워.”

아이라고 해서 아이의 시간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오늘이랑 내일 중 언제 시간이 괜찮아?”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작은 선택권만 있어도 강제로 동원된다는 느낌은 줄어든다.

아이 한 사람을 가족의 유일한 영어 창구로 만들지 않기 위해 부모의 노력도 필요하다. 시작은 힘들겠지만, 통역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한국어가 가능한 기관이나 주변 커뮤니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아이의 도움에 작은 보상을 해주는 것도 좋다. 용돈이나 좋아하는 음식도 좋고, 충분한 감사의 표현도 좋다.

중요한 것은 보상의 크기가 아니라, ‘네 시간과 노력을 내가 알고 있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지지 않는다. 작은 부탁과 서운함, 말하지 못한 미안함과 억울함이 쌓이며 만들어진다.

그 거리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역할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안전장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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