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삼두동맹 (삼두동맹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소 그리고 카이사르, 3인방을 말한다)라고 일컫던 기원전 55년경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 중, 정치적 기반이 제일 약했던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통하여 로마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고 권력을 얻기 위해 약 8년에 걸친 갈리아 지역을 정복한 전쟁 이야기이다.
이는 로마의 국익을 지키는 동시에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목표였기에, 그는 이 원정을 통해 갈리아의 다양한 부족들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원정의 배경을 대충 간추려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카이사르는 군대와 정치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갈리아 원정을 기회로 삼았다.
둘째, 갈리아가 단일 국가로 통합되어 로마를 위협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로마는 갈리아를 선점해야만 했었다. (50년 전 갈리아족이 로마를 침략했던 역사도 원정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주요 과정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부족들의 분열을 이용해 각 지역을 공략했으며 갈리아의 적군들이 영국으로부터 지원받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다를 건너 영국까지 두 차례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계속된 공격에 갈리아 부족들은 저항하기 위해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갈리아 연합을 결성했지만 7년간의 전쟁 끝에 기원 전 52년,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며 원정은 마무리되었다.
갈리아를 정복하기위한 탁월한 전술로 카이사르는 10년 동안 800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포로로 잡는 등의 전과를 올리며 갈리아 대부분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발판도 마련되었다.
당시 카이사르가 점령했던 갈리아 지역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룩셈부르크, 독일서부, 스위스 일대였다.
((브리튼섬 원정 이야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은 갈리아 전쟁 중이던 기원전 55년에서 기원전 54년 사이 카이사르가 브리튼섬을 두 번 침공한 사건이다.
첫 침공에서 카이사르는 두 개의 군단을 직접 지휘하여 켄트 연안을 잠시 점령하였고 두번째 침공에서는 628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다섯 개 군단과 2천명의 기병을 투입하여 켄트 지역 브리튼족과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내륙인 미들섹스 지방까지 진격하고 템즈강을 건너 브리튼족의 전쟁 사령관 카시벨라우누스를 패퇴시킨 뒤 트리노반테스족을 복속시켜 만두브라시우스를 예속 왕으로 앉히기까지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의 일환으로 브리튼을 침공한 것으로 정복할 의사는 없었기에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재빨리 갈리아로 퇴각하였는데, 실은 혹독한 브리튼의 겨울 날씨로 고생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로마 내에서도 침공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으나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인해 브리튼섬이 로마 시민들에게 최초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로마는 브리튼의 저항 세력들을 물리치고 브리튼을 완전히 정복 하기까지 수십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이 후, 브리튼섬은 400여년에 걸쳐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남게 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기간인 8년이 끝나고 복귀하는 시점에서, 로마의 공화정을 유지 옹호하던 원로원파의 극보수층들이 카이사르가 전쟁의 영웅으로서 왕정제로 복귀할 두려움 때문에 카이사르의 군대를 해산시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카이사르의 그 유명한 말인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의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로마의 내란이 발생했고 카이사르는 권력을 잡게 되고 독재관으로 임명 되었다.
결론적으로,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8년의 전쟁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로마 공화정을 제국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갈리아 전쟁 승리, 율리우스력 창조,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당한 최후,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