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독 (一讀)을 강력히 권(勸)합니다.
장길산
광대(廣大) 출신으로 광대놀이를 잘하고 용맹이 있었다 한다. 이런 탓으로 도당을 모아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해 조정의 큰 걱정거리가 되니 신엽(申燁)을 황해도감사로 삼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그의 도당 한 명을 잡아 장길산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체포하려 했으나 여당(餘黨: 나머지 무리)만을 잡았다. 다시 여러 고을의 군사를 징발해 각기 요소를 지키고 밤을 타 은신처로 쳐들어갔으나 미리 염탐하고 모두 달아났다.
1692년(숙종 18) 무렵 장길산 일당은 평안남도 양덕(陽德)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포도청의 장교를 보내 잡으려 했지만 또 놓쳤다. 그리하여 그 문책으로 양덕현감을 파직하고 이웃 고을에 체포를 독려하였다. 그 뒤 그의 행방이 묘연했으나 함경도 두만강 입구에 있는 서수라(西水羅)로 달아나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1696년 역적모의의 고변(告變)이 있었는데, 서류(庶類) 이영창(李榮昌)이 금강산에 있는 승려 운부(雲浮) 및 장길산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는 것이다.
곧 당시 장길산은 서수라나 벽동 등지에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마상(馬商)을 가탁(假託)하기도 하고 운산(雲山)의 군기(軍器)를 빼앗기도 하면서 활약했다 한다. 이 부대가 승려 세력과 함께 봉기해 서울로 쳐들어올 계획이라 하였다.
이 사건은 뒤에 노론과 남인들이 권력싸움을 벌이면서 무고라 해 무고자들만 처벌하기도 하였다. 당시 숙종은 이런 하교를 내렸다.
“극적(劇賊: 큰 도둑) 장길산은 몹시 사나워 여러 도를 왕래하면서 도당을 많이 모으고 있다. 이미 10년이 경과했는데도 아직 잡지 못했도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대가 포위해 잡으려 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으니 그 음흉함을 알만하다.”
그리고 각 관찰사와 병사에게 엄명을 내려 잡게 했고 많은 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