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파동

글쓴이: rainbows7  |  등록일: 06.10.2017 15:36:41  |  조회수: 583
아랫 글 허핑턴 포스트글 내용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글이 길어서 여기에 별도로 올렸습니다. 한인들은 한번쯤 생각해 볼 내용이니 알고가자.... 생각 됐습니다.
학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았던 이른바 ‘한글파동’ 사건은 1953년에 일어났다. 놀랍게도, 우리가 독재자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한글파동’  ㅡ 지식백과

1954년 7월 공포된 정부의 「한글 간이화안(簡易化案)」을 중심으로 빚어진 일련의 문화적·사회적 파동.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철자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시를 내렸다가, 학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았던 이른바 ‘한글파동’

내용
1933년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종래의 음소주의적(音素主義的) 정서법의 전통을 도외시하고 당시의 문법연구의 정수를 모아 이룬 형태주의적(形態主義的) 정서법인 것이다.
그 결과 일반에게는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기회 있을 때마다 음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반격을 받아왔다. 그러던 차, 1954년 3월 27일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달 안에 교정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발표한 그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담화문이 한글파동의 동기가 된 것이다.
이 담화문이 있은 한 달 뒤인 그 해 4월 27일에 공포된 「현행 철자법의 폐지와 구식 기음법(記音法)의 사용」이라는 국무총리훈령 제8호가 물끓듯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이를 학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그 해 7월 7일에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령 제31호로 설치된 국어심의위원회(國語審議委員會)에서는 풀어쓰기를 채용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3개월 안으로 맞춤법을 고치라는 대통령의 강경한 지시에 따라 1954년 7월 3일문교부는 「한글 간이화안」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ㄺ ㄻ ㄼ’ 11받침만을 쓰던 1921년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어 7월 7일에는 「한글 간이화 방안 이유편(理由篇)」을 공포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하자 그 해 7월 13일에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하여 현행 철자법이 ‘우리나라 문명 발전에 많은 장해가 되는 것을 정지시키자는 것’으로 ‘가장 단순해서 쓰기도 쉽고 알아보기도 쉽고 또 타자기나 외국인으로서 우리 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나 우리 국내의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국어를 배우려는 데도 속하고 배우기 쉽게 행하려는 것’이라 하여 정부안의 효율성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날로 더하여가는 반대 여론은 드디어 국회에까지 비화, 7월 12일 민의원(民議院) 제21차본회의는 정부·국회·학술원의 3자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 국어심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정부안에 반대한 기존 국어심의위원회를 자동 해산시키고, 「한글 간소화안」도 실시를 보류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1955년 9월 19일, 대통령은 담화를 통하여 맞춤법 문제는 이 이상 더 문제삼지 않겠고,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2년여에 걸쳤던 한글파동은 일단락을 지었다
한글파동 [─波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서 국문연구소(1907년 설치)를 계승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회원은 장지영·김윤경·최현배·권덕규 등 15~16명이었다. 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 활동으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한편, 1927년 2월 8일에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1]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쳤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고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 1942년부터 회원들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죄로 검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부활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한글만 쓰기 운동[편집]
일본 제국 패망 후인 1945년 11월 8일 이후 한글학자들은 한글만 쓰기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 해방 직후의 초·중등 교과서에는 한글만 사용되었으며, 필요시 괄호(도림) 안에 한자가 표시되었다. 단, 중학교에서는 한문교육을 실시하여 중국과의 교류, 고전(古典)에의 접근을 고려하였다. 공문서에는 한글이 전용되었다.
1949년에는 다시 '한자 전용안'에 의해 문서에 한자를 섞어쓰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1964년 성명서를 통하여 한글 학회가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일상생활에서 한글만 사용하자.
• 글자생활의 기계화를 위해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 '한글전용'은 한자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며, 한자어를 한글로 쓸 뿐이다.
• 학교 과목의 용어는 쉬운 한글로 표기하자.
• 더 철저히 한문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 한자로 적힌 고전은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
• 신잡지는 모두 한글로 써야 한다.
1968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한글전용5년계획'을 세우고, 이를 다시 단축하여 '한글전용촉진7개항', '한글전용연구위원회' 등이 생겨났다. (10.7 선언) 이에 맞추어,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글전용국민실천회'가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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