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콘돔. 짱돌을 맞을 각오로 썼다.

글쓴이: 한마당  |  등록일: 04.07.2022 17:11:09  |  조회수: 647
우크라이나의 콘돔
유비무환(有備無患)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준비해야 하고,
물이 흐르는 땅에는 장화를 준비해야 한다."

한민족의 무비장화(無備長靴)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

우리가 왜 단합이 안되고 목소리만 크고 제대로 하는 것은 없이 성질만 돋우고 부글부글 끓고 마는 행태가  반복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고 표현을 하는 가? 이런 행동과 표현의 방식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궁금하던 차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매장에서 가장 먼저 품절이 된것이 콘돔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필수로구나..라고,짐작만 했다. 하지만,점령군이 오면  젊은 군인의 혈기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여자들 스스로 직감하고 미리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침략을 받았을 땐,장화(콘돔)를 신지 않고 빗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어야 하는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결과 정체성이 모호한 요괴인간(?)이 탄생하여 거리를  활보하게 된것이 그 원인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아예 신부를 수입해 화를 자초하고 있다. 물론,위정자들은 바라던 바다. 말없이 순종을 하기 때문에 통치하기도 편하다. 그들의 말을 빌어 표현을 하면 '우민화정책'의 일환으로 개나 돼지'로 전락하여 그 취급을 당하는 꼴이다.

아래에 어떤 역사 학자가 민족의 우수성이라고 쓴 글이 있어 가지고 왔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자랑이 아니다. 은둔과 끈기를 가지고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변하는 격랑의 역사에 묻혀 흘러갔을 뿐이다. 물론,변화에 잘 적응하여 생존한 것은 크게 자랑할 만 하다고 본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고,변화에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 남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목숨만 부지하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산 목숨을 모두 누군가의 호적에 올렸다. 그렇게 개와 돼지의 국민이 탄생하여 오직 살기 위한 기회주의 공동체가 현재 대한민국이다.

***
이기대 大香문화해설, 생태해설
역사의 흔적
우리나라가 외침을 받은 횟수 | 역사의 흔적
바람 2011. 11. 14.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이민족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오면서도
은근과 끈기로서  이를 극복한 강인함이 내포되어 있는 민족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외침을 받은 것은 993회, 또는 1천번 이상 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횟수만을 놓고 보면  이 숫자가 나올 수 없고,  왜구 또는 거란,
여진 등  북방 이민족들의 소규모 노략질 까지를 포함 한다면 위에 예시한 숫자가 나올
것이라 여겨 진다.

우리가 지난 4천 5백여년동안 외침을 받은 회수는 역사상 기록된 것만 추려 보자면
993회가 아니라 90회 정도로 계산하는 것이 옳다는 결과를 얻었다.

[조선시대에는 7회]
우선 조선시대를 보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것이 근세로 부터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이 침략해 온 사실이 있다.
그 이전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일본이 2회, 병자호란 등 청나라가 2회다.
그래서 조선시대 통틀어서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을 7회로 계산한다.
청일 전쟁때와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 군대와 청나라 군대, 러시아 군대가 진입
했지만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는 제외 한다.

[고려시대는 21회]
고려시대때는 거란이 6회, 몽골이 7회, 홍건적 2회, 그리고  왜구의 침략이 수 회
있었다. 홍건적의 침략은 특정 국가를 대표하는 군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만 워낙 대규모인데다 스스로 독자적인 정치집단이라고 주장 했기때문에
침략을 받은 나라 입장에서는 외국의 침략 사례로 포함시켜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은 규모와 형식을 볼 때 외국으로 분류하기가 애매할 정도
로 소규모 침략이 많았다.  따라서 왜구의 침략 중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것만을
꼽자면 5회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침략을 받은 회수는 21회로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후기 신라 시대에는 1회]
후기 신라 시대에 외국의 침략을 받은 것은 삼국통일 직후
당나라가 10년동안 신라를 공격한 것 말고 뚜렷하게 없다.
중간집계를 해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 이후
지난 1,300년 동안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약 30회 정도 침략을 당한 사실이 있다.

[삼국시대 - 고구려]
대체로 50회 정도의 침략을 받았다.
정리하면 당나라로부터 10여회, 수나라로부터 4회,
선비족인 모용씨의 나라인 연나라가 10여회,
중국의 삼국시대 나라인 위나라가 1회,
한나라 시절에 광무제와 왕망이 각 1회씩 침략한 적이 있고
요동 태수, 현도 태수, 유주 자사 등이 몇 차례씩 침략했는데
한나라 시절을 모두 합쳐 20회 미만이다.

[삼국시대 - 백제]
700년 가까운 역사 중에서 외국의 침략을 받은 것은
한 차례로 정리해야 한다.
백제는 신라, 고구려, 말갈, 낙랑 등의 정치 집단과
끊임없이 전쟁을 했지만 이것은 대외 침략 사례로 구분하기 어렵다.
당시에는 상호간에 외국이라는 개념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조상님이 됐기때문에
외국과의 전쟁이 아니고 내전으로 구분하는 것이 마땅하다.

[삼국시대 - 신라]
신라가 외침을 받은 사례는 없다. 왜구의 침략과 백제의 침략과
고구려의 침략과 말갈의 침략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의 경우 국가적인 차원의 군대 파견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본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은 당연히 내전으로 간주한다.
말갈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말갈이 고구려에 부속한 정치집단으로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낙랑의 침략 사례가 여러 차례 기록돼 있으나  낙랑은 한라라 중앙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는 근거가 희박하고 결국 우리 나라의 영토로 통합됐다는
점에서 일단 내전의 사례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고조선]
고조선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기록한 것이 거의 없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고
중국 측에서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한나라의 침략을 받은 것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지난 반만년  우리 나라 역사에서 노략질 수준의 
침략 받은 것을 제외하고 국가대 국가의 침략한 사례는 80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 한다.

다만 낙랑의 경우도 외국의 범주에 넣어 계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낙랑이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사례를 모두 외국의 침략으로 봐야 한다.

그렇게 계산했을 때 낙랑이 우리 나라, 즉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를 침략한
사례는 10차례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외국이 침략한 사례는 최대 90회 정도다.
결국 우리가 외침을 받은 회수는 모두 합쳐서 백번을 넘지 않으므로
993회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모르겠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간 전투를 외침으로 계산하거나 또는 왜구의 침략을 모두
계산하면 그런 숫자가 나올 수 있다고 보며, 소규모의 외적 침입으로도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이를 방비하자는 교훈적 의미에서 그 횟수
를 모두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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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한마당  04.07.2022 17:15:00  

    愚民化 政策

    국가 정권이 국민들을 정치와 국정에 관심도 없고, 판단할 능력도 없는 우민으로 전락시키는 정책을 뜻한다. 대개 독재 또는 부패 정권에서 일어나며, 유흥문화의 육성을 통하여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 지식인과 엘리트를 탄압하거나 학살하는 반지성주의, 철저한 언론통제를 통한 정보의 차단, 교육의 의도적인 하향평준화, 역사왜곡 등을 통해 이뤄진다.

  • 한마당  04.07.2022 17:18:00  

    우민화 정책의 주된 목적은 정부의 편리한 통치를 위해 국민 의식수준을 낮추는 데 있다. 불만이나 비판들을 틀어막기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애초부터 그런 비판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국민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전근대에는 기초적 교육을 제공하지 않고 지식을 친정부적인 권력층에만 집중시키는 방법을 주로 썼다. 또한, 국민들에게 의무교육은 제공하되, 고등교육은 특권층에 한정하고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 혐오를 조장하는 방법도 있다.

  • 한마당  04.07.2022 17:20:00  

    우민화 정책은 대개 삽질로 끝난다. 순전히 정권 유지만을 위해 국가의 장기적인 미래를 희생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평균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중우정치가 이어지면 필연적으로 국가 경쟁력도 떨어진다. 국제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은 물론이며, 더한 파국으로 치닫을 수도 있다. 단기적으론 정권안정과 통화증발을 통해 일시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를 장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선 다수의 고급 인재가 필요하고, 국민평균 교육수준도 높여야 한다. 우민화 정책을 포기하지 않아서는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 한마당  04.07.2022 17:22:00  

    게다가 우민화 정책은 장기적으론 본래 목적인 정권 유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국민들이 정치,경제,사회,외교 등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보니, 나라가 쇠락하는 상황에서도 사태 파악을 못하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이 되려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지성적이지 않은 국민은 자극적 선동과 포퓰리즘에 잘 휘둘린다. 그래서 우민화 정책을 시행하니 경쟁자가 대중을 선동해 되려 본인들을 공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