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넷플릭스 세상에 빠졌다"

연합뉴스 | 입력 12/10/2019 10:24:47
글자크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인쇄하기
'아이리시맨'[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골든글로브 후보 대거 배출…거장들과 협업 통해 주류로 떠올라
"국내서도 넷플릭스 러브콜 기다리는 감독 많다"

 

"넷플릭스 세상이다. 할리우드는 그 안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NYT)가 9일(현지시간) 제77회 골든글로브 후보작 선정 결과를 보도하면서 언급한 말이다.

 

넷플릭스 영화는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이야기'를 비롯해 총 17개 후보에 올랐다. '결혼이야기'는 작품상을 비롯해 모두 6개 부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아이리시맨'은 5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TV까지 포함하면 넷플릭스 작품의 부문별 후보 합산은 34개에 달한다.

 

NYT는 "넷플릭스가 입이 벌어질 정도로 영화 부문을 장악했다"고 보도했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할리우드가 스트리밍 마을이 된 것일까? 골든글로브 후보작 발표를 보면 답은 '그렇다'이다. 다른 전통적인 영화사들을 앞질렀다"라고 썼다.



'결혼이야기'[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만든 작품이 올해 각종 시상식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위상도 달라지는 분위기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넷플릭스 영화는 "기존 영화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아"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봉준호 감독 '옥자'와 노아 바움백 감독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 등 넷플릭스 영화가 진출하자, 프랑스 극장 사업자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당시 갈등은 극장업계와 넷플릭스 간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영화의 개념을 어디까지 볼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주류로부터 배척을 당하던 넷플릭스가 이제는 '주류'를 넘본다. 아낌없는 재원을 투자해 만든 오리지널 콘텐츠들이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고, 권위를 자랑하는 각종 시상식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6언더그라운드'[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거장들과 손잡은 전략이 주효했다. 코엔 형제, 알폰소 쿠아론, 마틴 스코세이지뿐만 아니라 '트랜스포머'를 연출한 마이클 베이 감독, '본 시리즈'로 유명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 등 상업 영화감독과도 손잡고, 실험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영화들을 선보였다. 넷플릭스와 거장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6 언더그라운드'를 들고 최근 방한한 마이클 베이 감독은 "나는 큰 규모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서 (넷플릭스 상영이) 아쉬움이 있긴 했다"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다른 방식을 소비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가 제작비 600억원을 대 '옥자'를 찍은 봉준호 감독은 "예산 규모가 너무 클뿐더러 영화 내용도 과감하고 독창적이어서 망설이는 회사가 많았지만, 넷플릭스는 내게 전권을 줬다"며 "이 정도 예산의 영화에서 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로마'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현실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즐기게 하려면 넷플릭스가 적합했다"고 떠올렸다. '로마'는 멕시코어를 사용해 흑백으로 찍은 영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다 보니 전 세계 1억5천만명 가입자를 지닌 넷플릭스를 선택했다는 의미다.



'아이리시맨'[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가 넷플릭스와 손잡은 일은 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 쟁쟁한 거물들을 데리고 3시간 30분에 달하는 장대한 범죄 드라마 '아이리시맨'을 그려냈다. 그는 지난 10월 로마 영화제에서 "우리는 할리우드에서 이 영화를 만드는데 드는 돈을 구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돈을 주지 않았다. 넷플릭스가 와서 말하기를 '디에이징'을 포함해 지원해주겠다고 했다"며 넷플릭스 선택 이유를 밝혔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마틴 스코세이지가 넷플릭스와 작업한 것은 미국, 나아가 세계 영화사의 어떤 상징이 넷플릭스에 포섭됐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평했다.



'로마'[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이런 협업은 이미 큰 성과를 냈다. '로마'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의 영예를 안았고, 올해 제9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3개 부문 트로피를 휩쓸었다.

 

넷플릭스는 특히 아카데미상 수상에 공을 들인다. 지난 8월 문을 닫은 뉴욕 마지막 단관 극장 '파리 극장'을 장기임대해 재오픈한 것도 아카데미상 최소 출품 요건(최소 7일 동안 극장 상영)을 맞추려 극장을 확보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성은 평론가는 "넷플릭스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겨냥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는 것은 애플, 디즈니, HBO 등 OTT 시장 경쟁이 심화함에 따라 자사가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 보유한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드라마 '킹덤 시즌 2'[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넷플릭스는 할리우드뿐 아니라 아시아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이다. 2016년 1월 한국 진출 후 영화 및 드라마 창작자들과 손잡고 오리지널 콘텐츠를 선보였다.

 

영화 '옥자'를 시작으로 드라마 '킹덤' '페르소나' '첫사랑은 처음이라서' '좋아하면 울리는' 등을 잇달아 공개했다. '인간수업', '보건교사 안은영',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 등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영화계 관계자는 "넷플릭스의 러브콜을 기다리는 감독들이 많이 있다"고 귀띔했다.

 

극장들도 넷플릭스와 '상생' 제스처를 보인다. 짧은 홀드 백 기간을 이유로 넷플릭스 영화를 보이콧해왔던 멀티플렉스 중 일부는 넷플릭스 영화에 서서히 빗장을 풀고 있다. 다양한 콘텐츠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요구를 반영해서다.

 

정지욱 평론가는 "넷플릭스가 이제는 영화 산업 자체를 주도하는 성격으로 바뀐 것 같다"면서 "그러나 앞으로도 영화계 전체를 넷플릭스가 이끌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관이라는 고유 창구를 관객들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내다봤다.